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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스크랩] <마크 트웨인 자서전> - 살아 있는 가슴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

by 프시케 psyche 2014. 3. 13.

마크 트웨인 지음 / 안기순 옮김 / 고즈윈 펴냄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자서전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자서전을 읽기 시작한것은 이제 1년이 넘었지만 겨우 몇 권의 자서전을 완독했을 뿐이다. 러셀이나 간디의 자서전이 서재의 어느 구석에서 벌써 1년째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읽고자하나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대하소설이나 자서전이나 매 한가지다.  읽고자하는 것은 이 책들이 독자의 도전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분량 때문이겠다.  그러나 읽는 중에, 또 읽은 후에 가장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 자서전이었다.  그만큼 자서전에는 리얼리티라는 고유한 매력이 숨쉬고 있다.  이 사실성 속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혹은 내가 걸어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자서전은 타인의 인생 메뉴얼이다.  인생이 거기서 거기인데, 이미 겪어본 사람들의 인생에서 얻을게 많지 않겠는가?  자서전 문학이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특성은 읽는 재미와 함께 독자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2009년 12월 한 달 동안 빼곡하게 500여 페이지와 꽤 긴 시간적 거리감이란 갑옷속에서 좀처럼, 독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서전한 권을 손에 잡았다.  <마크 트웨인 자서전>이다.   마크 트웨인은 1835년생이다.  까마득하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안타깝게도 어린시절 이들 작품을 읽지 못했음에도, 나는 마크 트웨인이나 그의 작품들이 무척 눈에 익다.  유년시절 책이 아니라 티브이 만화영화를 통해 이 작품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읽은것보단 어쩌면 더 생생했을 수도 있겠다.  왜! 유년이었으니까.   마크 트웨인이란 작가의 위치는 어디쯤 될까?   20세기의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이란 책에서 마크 트웨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미국의 모든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이 쓴 한 권의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을 때 아이들이 검둥이 짐을 탈출시키는 장면에서 읽기를 멈추어야 해요.  그게 진짜 끝이거든요.  나머지 이야기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책은 미국의 최고 걸작이고 미국의 모든 글은 그 작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그만큼 훌륭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中

 

이 자서전의 특징은 한 인간의 생애 대한 무한한 솔직함과 세밀함, 거침없는 유머와 고백이 될 것이다.  내면의 풍경을 솔직하게 담아내는 것이 자서전 저자의 의무는 아니다. 또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도 아니다. 자신의 개인사를 밝히는 것은, 문학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돌려하는 것보단 몇 배 어려운 일이다.  일단 그것이 시가 되거나 소설이 되면, 작가에게 짐지워진 어떤 혐의는 모두 작품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등장인물의 거친 입담이나 행동의 광폭함 같은건 문학작품 안에선 모두 용서가 된다. 그건 그 작품이 문학이란 옷을 입는 순간 현실세계와 거리감을 유지하는 자동적인 시스템 덕분이다.  자서전을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오직 자서전만이 그러한 방어장치를 갖지 못한다. 

 

마크 트웨인은 이 자서전에서 이런 위험성을 깊이 고려해, 자신의 자서전 출간을 사후로 설정했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훗날 자서전의 일부분이 될 글들을 틈틈히 썼다.  그리고 1877년 42세때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을 시작한다.  그의 자서전 원고들은 직접 타이프 되거나 구술되었다.  일정한 시간순서로 한 권의 자서전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일화 중심의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자서전은 마크 트웨인의 사후에 편집인에 의해 세번 정도 다른 버전으로 출간된다.  이 책은 찰스 네이더라는 작가에 의해, 편집 출간된 찰스 네이더 판 자서전으로 1959년 출판 이후 그의 자서전으론 가장 큰 호평을 받았다.  마크 트웨인이 자서전의 사후 출판을 예고하며, 그 이유를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사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연애편지다. 작가는 자신의 편지를 다른 사람이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순간부터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느낀다. "  8p. 마크 트웨인 자서전 

 

무덤안에 잠자고 있는 순간,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 다운 유머와 솔직함이 묻어난 표현이다.  그리고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연애편지는 진실이나 솔직함이 아니라, 목적의식과 과장됨이 더 살아 숨쉬는건 아닌가?  무한한 자유로움은 일기라는 장르에서 더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 자서전을 일기처럼 썼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무덤안에 누워있으면 세상의 독자들이 그의 일기장을 훔쳐보든지 안 보든지 그건 문제될게 없기 때문이다.  참 속편하다.  그러니 글도 속편하게 썼겠다. 이 자서전이 어떤 식으로 서술되었을지 우린 여기서 감잡게 된다.  그의 공언대로 이 자서전은 삶의 원경과 근경 모두를 적절히 담아 내고 있다.  철저한 일화 중심의 서술은 자칫 너무 사소해서,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살았던 미주리 주의 한니발에서의 추억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의 동창생들에 대한 이야기나 동생을 짗궂게 놀려먹은 일 등을 이야기할때 만년의 그의 작가로서의 무게감이나 권위는 찾아볼 수 없다.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한 그의 유년의 기억은 <허클베린 핀의 모험>이란 소설의 기원을 확인해준다.  자서전의 초반에서 우린 문자로서 그린 한 편의 수채화를 보게 될 것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묘사들이 살아 숨쉰다.

 

그러나, 이 자서전 곳곳에서 그는 돈에 물들어 있는 미국을 비판하며, 종교나 국가권력, 동시대 유럽과 미국민의 오만함을 질타하기도 한다.  진중함이 균형잡힌 모습이다.   작가로서 지겨야 할 기품이란 요소를 우린 이 자서전 속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성역없는 비판의 정신이며, 자유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다.  세상에 대해 생각대로 발언할 수 있는 용기다.   500여페이지란 육중한  자서전의 행간을 걸으며, 결국 독자는 마크 트웨인에게서 허리베리 핀의 환영을 보게 될 것이다.   철없는 장난 꾸러기 같지만, 자유와 우정을 위해 용감한 모험을 시도했던 그 철부지의 행동에서 노예해방과 평등이란 미국의 양심을 발견케 된다. 

 

19세기라는 시간적인 거리감과 전통있는 미국식 유머는 이 자서전의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다. 500여 페이지를 번역체의 싱거운 유머와 그 시절의 세밀한 풍경들,  가족과 친구들에 얽힌 시시한 일화를 가로지르며 읽는 일은 어쩌면 고욕이랄 수도 있었다.  인터넷 서점의 어느 구석에서 이 책에 대한 다른이의 리뷰를 구경하려 했더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이 자서전에 도전장을 내민이가 없단 말인가?  출판사의 화려한 광고문구인 "대가의 자유로움, 거인의 솔직함, 천재의 상상력, 그 모든 위대함으로 가득한 20세기 최고의 산문"이란 타이틀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이러한 슬로건은 그의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고전에나 어울릴법 하겠지만, 이  자서전엔 부적절하다.  그것보단 자서전 장르에 하나의 개성으로서 오늘날 이 작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형식의 파괴다. 시간순서나 철저한 업적, 진중한 사건 위주로 서술 되어야 한다는 고정된 관념을 이 자서전이 가정 먼저 용기있게 파괴시킨 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서전을 읽으며 용기를 얻는다. 당신도 자서전을 쓸 수 있으며, 쓸만한 자격이 있다는 그것을 마크 트웨인은 이 책에서 손수 가르쳐 준다. 모든 평범한 이들의 삶은 독창성으로 가득찬 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그는 확인시켜 준 것이다.

 

"엄마,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믿었어요. 하지만 이제 인디언들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요. 이 말은 곧 우리가 틀릴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나는 신과 천국이 정말로 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좀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있어요." p. 299  마크 트웨인 자서전

 

19세기를 주름잡았던 한 위대한 작가의 만년을 이 자서전에서 읽는 일은 지금도 쓸쓸하다.  마크 트웨인은 1910년 그가 죽기 전에 힘겨운 시절을 보낸다.  작가로서 큰 부를 얻었지만, 1894년 운영하던 출판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곤경에 처한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몸이 불편한 부인과 둘째딸 클라라를 데리고 세계를 돌며 강연여행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이미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그 명성으로 부를 쌓아 편안한 시절을 보내야 할 때, 그는 가족을 이끌고 돈을 벌기 위해 노년의 강연여행이란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교훈을 그는 죽을때까지 가르쳐준다.  이 시절 그가 무척 아꼈던 큰딸이자, 자신의 자서전을 어린 시절 써 내기도 했던 딸, 수지를 병으로 잃었다.  불행은 겹으로 오는가?  1904년에는 평생,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를 잃었고 죽기 일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엔 막내딸 진을 먼저 떠나보냈다.  돈을 모두 갚자, 불행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려온 것이다.  자서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때 너무도 풍요로웠던 내가 지금은 얼마나 가련한지!"라는 말의 울림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마크 트웨인의 상심의 깊이를 측정하게 해준다.

 

큰딸 수지는 마크 트웨인을 닮아 무척 명랑하고, 사려깊은 아이였다.   20대에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수재였다.  수지의 일곱 살을 묘사하면서 마크 트웨인이 인간의 삶에 대해 짧게 요약한 문장은 곧 이 자서전의 특징중 하나인 페이소스(연민의 감정)를  담아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나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흐름은 인간이 존재하는한 계속될 것이다. 약간은 비극적이고, 염세적이긴 하지만 또한 어느정도의 진실을 담보한다.  반면, 이 자서전의 거대한 흐름을 요약하고 있는 듯한 문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 자서전의 요소 하나가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유머'다.

 

"수지는 일곱 살 때 이미 인간의 덧없는 삶속에서 미친 듯이 반복되는 사건에 짓눌리고 상처받았다. 마치 억압받고 당혹스러워하는 성숙한 성인처럼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하고 땀 흘리고 고군분투한다.  언쟁을 벌이고 비난하고 싸운다.  서로 앞다투어 조그만 이권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면서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고 질병이 뒤따른다.  수치와 굴욕이 자존심과 허영에 상처를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삶의 즐거움은 고통받는 슬픔으로 바뀐다.  고통, 근심, 비참함의 무게는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마침매 야망이 죽고 만다.  자존심이 사라진다. 허영이 무너진다. 그러고는 드디어 세상이 부여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없는 선물을 받는 순간에 도달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진다.  자신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만을 저지른,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단 하루 애도를 표하고는 영원히 잊어 버리고 마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이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똑같이 무익한 길을 걷다가 똑같이 사라져간다. "  p. 298  마크 트웨이 자서전

 

결국, 독자는 이 자서전을 읽으며 삶이 가진 풍요로움과 비애감을 깨닫게 된다. 극과 극이 섞여 조화로움을 이루는 것이 세상이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이 자서전을 써나가면서, 자신의 인생이 가진 다양성을 고려했다.  인생을 하나의 관점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유머와 페이소스가 함께 묻어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 균형감이 곧 이 자서전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어쩌면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무언가에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큰 법이다.  삶이 언제나 진중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가끔은 웃자.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욕해서도 안 된다.  이 자서전의 흐름처럼 삶은 모든 잡스러운 것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잡스러운 것들은 사소한 법이다.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어서 위대하지 않고, 가볍기조차 하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잡스러움에 맞서 마크 트웨인식 유머를 인생에 초빙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은 지루하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도 가끔은 무척 지겨워진다.  그러나 지겨움은 인생의 해악이 아니라,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이 자서전의 어느 구석에서 한 줄, 문학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만났다.  "살아 있는 가슴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그는 썼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 근접한 정의같다.  이 자서전이 문학으로서 읽히는 이유는 행간에서 한 작가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 자서전이 놀랍도록 지겹지만, 기가막히게 생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까?

 

 

 

 

2010. 1. 9

출처 : 개츠비의 독서일기 2.0
글쓴이 : HPJlov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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