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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소리/오늘은 이런일이.....

시같은 소설 한강작가의 '흰' 을 읽고

by 프시케 psyche 2024. 11. 4.

 

 

 

다른 책에 비해 이 책 '흰'은

소설 이라기보다는.

작은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산문집 같기도 하고

시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독후감을 다 써놓았는데

몽땅 날아가 버렸다

공들여 쓴 글이 날아가니

갑자기 그때 그 감정이 다 사라진 느낌이다

정말 길게도 썼건만

ㅠㅠㅠ

그 감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이 더 크다

 

'흰'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

이렇게 '흰'이라는 단어를 정의 내리고 있다..

 

흰 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 나-12개의 글

2. 그녀-22개의 글

3. 모든 흰-11개의 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각 글들은 흰색과 관련된 사물이나 개념의 글이 구성된다

배냇옷, 강보, 소금, 눈, 연기, 파도, 등등

 전반적으로 상실과 죽음, 기억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루어졌다.

깨끗하고 순수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잃어버림, 죽음, 슬픔, 비움 같은 것으로 비유되어 있다.

태어날 때 입는 배냇저고리부터 죽음 이후에 입는 수의까지

갖가지의 흰색으로 된 것들에 대해 쓴다.

 

글들에 묻어있는 서정성에

읽다가 멈추었다  한번 더 읽게 되는 글들이 많다.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언니와

엄마의 상태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사물들에 대해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단어 하나하나에 시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이

듬뿍 묻어나는 책이다

 

 

 

 

흰 개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 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덥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강보'

 

엄마의 조산으로 인해

이른 진통이 오자 어머니는

들은 바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하고

아이를 혼자 낳지만

가까스로 눈을 떠 엄마와

눈을 맞춘 아이는

2시간 만에 죽는다

그 아이를 낳기 전 고통 중에 만든 아기의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강보에 싸 아버지에 의해 묻히는

그 언니에 대해 

 '강보'와 '배내옷'에서 쓴다

 

 

'배내옷'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블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죽지 마라 제발.

 

 

아이를 낳아 본 엄마라면 다 기억하는

강보와 배내옷에 관한 글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가 죽는 걸 보는 엄마의 마음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나도 사실은 개인적으로

바로 밑에 쌍둥이로 나온 여동생을 잃은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받은 쌍둥이 동생들은 거꾸로 출산을 하게 되어서인지

아이들이 건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살아있는 여동생이 더 약해서

걱정을 했지만 조금 더 건강했던 동생이

한 달 만에 천국으로 갔다고 한다.

옛말에 쌍둥이 중에 한 아이가 죽으면

그 남은 아이도 조금 있다 데려간다 하여

빨래 방망이를 죽은 동생 옆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을 때 정말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이글에 나오는 죽은 언니에 대한 글을 읽는데

나의 한 달밖에 못 살고 간 여동생이

오버랩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화자는 만일 언니가 살아있다면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내어 준다거나

어려운 수학숙제를 가르쳐 주거나

가끔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언니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는 글이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 하나 남은 쌍둥이었던 동생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만일 그 쌍둥이 가 살아있다면

내 여동생은 그녀와 무슨 일들을 하고 싶었을까?

둘이는 하나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같이하고

서로 사랑했겠지?  

 

'안개'

 

오래 전 이렇게 안개가 짙었던 섬의 아침을 기억한다.

함께 여행을 더난 일행들과 바닷가 절벽길을 산책했었다.

어른어른 모습을 드러낸 소나무들.

깎아지른 잿빛 벼랑.

해무 아래 일렁이는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던,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서늘해 보이던 일행들의 뒷모습.

하지만 다음날 오후 같은 길을 걸으매, 

그 길의 풍경이 원래 얼마나 평범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신비스러운 늪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먼지 긴 마른 웅덩이였다.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하던 소나무들은 철조망 너머로 줄을 맞춰 심겨 있었다.

바다는 관광엽서 사진처럼 짙푸르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경계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숨을 참으며 다음 안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렸던 안갯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 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 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이방인의의 도시는 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안갯속에서  그녀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흰 도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정병국)는 

1973년부터 문화예술 분야, 기초 예술에 중정을 두고

예술 생태계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작가들을 위해 주요 해외 기관과 업무 협약을 맺고 작가를 파견하는

지정형 레지던시를 통해 해외 창작 활동을 할 때

2014년 한강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파견되어  4개월간 체류하던 해 가을

항쟁 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부설 극장에서 1945년 미국 공군기가

촬영한 그 도시의 영상을 본다.

당시 독일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 '흰' 도시 모습을 보며

그 도시의 운명을 닮은 언니를 생각하며

이 시 같은 소설 '흰'을 구상했다고 한다

파괴되었다가 남은 밑부분과 윗부분이

연결되어 재건된 도시

그 도시의 건물들은 70년 이상이 된 건물이 없고

파괴되었으나 끈질기게 재건된  도시를 생각하며

2시간 만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작가의 마음속에 수없이 다시 살아나

작가가 생각하게 하는  언니에 대해 쓴 것이 이 '흰'이다

 

 


'파도'

 

멀리서 수면이 솟아오른다. 거기서부터 겨울 바다가 다가온다.

힘차게, 더  가까이 밀려온다. 파고가 가장 높아진 순간 하얗게 부서진다.

부서진 바다가 모래펄을 미끄러져 뒤로 물러난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마치 영혼이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바다는 가족여행으로 해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많이 가곤 했다

저녁노을이 질 즈음

바다 위에 수천수만의 다이아몬드 같은 반짝임을

나도 여러 번 보았다.

 

 

 

'진눈깨비"

 

진눈깨비의 삶은 특별히 누구에게도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컹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 온 모든 게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컹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 눈깨비.

 

한강작가는 유난히 눈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흰'이라는 책에도 눈에 관한 글이 많이 있다.

 

 

 ' 흰 개'

 

'흰 개'라는 글에서는

눈물이 났었다..

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글에 나왔던 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정말 슬펐다.

 

화자는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동네 어느 집에

묶여 있던 하얀 진돗개 종류의 개를 보곤 했는데

다른 개들이 사람을 보면 짖는데 비해

그 개는 짖지 않아

유머에서 말하는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의 

답인  " 안개"라는 이름을 그 개에게 지어준다.

그러나  유난히  화자를 보면 두려운 눈빛으로

쇠사슬 소리를 내며 뒷걸음치던 안개.

그러나 어느 날 본가에 갔을 때 그 개가

결국은 쇠사슬에 묶여 있던 그 자리에

조용히 엎드려 숨졌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며

어머니가 한 말이 귀에 오래 남는다.

"몹쓸 짓을 오랫동안 당했나 보더라"

 

 

'눈보라'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 연약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것

 

 

 

'초'


흘러내리는 촛농을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 넣으며 초들 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서리'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온다.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돌이나 건물 같은 단단한  사물들은 미묘하게 더 무거워 보인다.

외투를  꺼내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뒷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 사람들의

묵묵한 예감이 배어있다.

 

'날개'

 

이 도시의 외곽에서 그녀는 그 나비를 보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접고 누워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는 나비들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어디서 버텨왔던 것일까?

지난주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는 데,

그 사이 날개가 몇 차례 얼었다 녹으며 흰빛이 지워졌는지

어떤 부분은 거의 투명해 보였다.

바닥의 검은흙이 어른어른 비쳐 보일 정도였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남은 부분도 완전히 투명해질 것이다.

날개는 더 이상 날개가 아닌 것이 되고,

나비는 더 이상 나비가 아닌 것이 된다.

 

 


'소금'

 

어느 날 그녀는 굵은소금 한 줌을 곰곰이 들여다봤다.

희끗한 그늘이 진 굴곡진 입자들이 서늘하게 아름다웠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

변화하는 것은 다시 살게 하는 것, 다시 사는데 필요한 것이 그 무엇이든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 옛날 소금으로 일값을 받고, 소금으로 목숨을 구하고,

소금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러니 소금의 그늘이 내어주는  그늘은 진정 '흰'색이다.

 

이 소금에 관한 글을 읽으니

언젠가 외할머님께서 우려 주시던 땡감이 생각이 났다.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댁에 가곤 했다.

 할머니는 익지 않은 땡감이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소금물에 감을 담근 작은 항아리를

아랫목에 이불을 씌워 감을 달큼하게 우려 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감을 엄청 좋아한다

단감의 그 달콤함을 깨물면 외할머니의

함박웃음과 굵은 주름 그리고 유머 넘치는 위트 속에 사랑이 묻어나곤 했다.

떫은 감을 달콤하게 변화시키는 이 소금물

한강작가도 땡감을 소금물로 우린 감을 먹어봤을까?

 

 

 

'레이스커튼'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은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 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 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하얗게 웃는다'

 

 쓸쓸하게, 아득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흰돌'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내며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파도에 닳아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이었다.

속이 들여다 보일 듯 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속이 들여다 보일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실은 평범한 하얀 돌이었다.) 

가끔 그녀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는  가족 낚시를 하러 간 호숫가에서

손안에 잡으면 딱 맞을 작고 예쁜 돌을 하나 주웠었다.

그 후 나는 일본 장례를 다룬 

 영화 'Good' bye'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작은 돌을 주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그 돌을 만지라고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었다.

영화를 본 후

나는  호수에서 주워온 그 돌을 아들에게

주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라고" 하면서

"엄마를 생각하며 만지면 그 어렵고 힘든 일이

더 이상 힘들고 어렵지 않게 된단다"라고 말하며

준 기억이 난다.

 

 

'백야'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이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까?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있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 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이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 악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밥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 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그럴 때 가울을 들여다보면 ,

그것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은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왠지 이글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깨진 그릇은 붙여 쓸 수 없듯이

한 번 금이 간 사이에는 더 이상 재고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아

마음이 짠 했다..

 

 

'고요에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날이 가까워질 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이 집의 어둑한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가고 커튼 없는 북동쪽 창이 짙푸른 박명을 들여보낼 때

군청색 하늘을 등진 미루나무들이 서서히 깨끗한 뼈대를 드러낼 때,

그녀가 세든 건물의 누구도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일요일 새벽의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이 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경계'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자랐다.

 

칠삭둥이로 그녀는 태어났다.

스물세 살 난 어머니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산통이 왔다.

갑자기 첫서리가 내린 날이었다.

집엔 어머니 말고 아무도 없었다.

갓난 그녀는 가느다란 소리로 잠시 울었을 뿐 곧 조용 해졌다.

조그만 피 묻은 몸에 어머니는 배내옷을 입히고,

얼굴이 가려지니 않도록 조심조심 솜이불로 감쌌다.

빈 젖을 물리자 아기는 본능적으로 아주 약하게 빨다 곧 그만두었다.

아랫목에 눕혀둔 아기는 더 이상 울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무서운 예감이 든 어머니가 이불을 조금씩 흔들어볼 때마다

아기의 눈이 열렸지만 곧 흐려지며 감겼다.

그나마 언젠가부터는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되기 전 마침내 어머니의 가슴에서

첫 젖이 나와 아기의 입술에 물려봤을 때,

놀랍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의식 없는 상태로 아기가 젖을 물고 조금씩 삼켰다.

점점 더 삼켰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지금 자신이 넘어오고 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갈대숲'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도 있다는 사실을,

숨 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어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백지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떠날 때 아직 여름이었던 서울이 얼어  있었다.

뒤돌아보자 구두 자국들이 다시  눈에 덮이고 있었다.

희어지고 있었다.

 

 

'작별'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모든 흰'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주제는 흰색의 다양한 상징들과 

흰색의 순수하고 깨끗함

고요함, 비움, 공허함, 죽음등을 연결시켜

독자들에게 흰색의 것들을 간접 경험하게 하려 한 것 같다.

상실과 기억 상처와 치유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며

언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무섭거나 고통스럽다기보다는 

평온함일 수도 있으며 죽음을 이해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 죽어있는 것들도

죽은 게 아니고 기억 속에 끝없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글을 읽으며

왠지 모든 흰색에 관한 것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나도 사실은 유튜브채널에서

'오래됨을 입다'라는 플레이리스트에

늘 옷색깔에 맞는 말들이나

글들을 생각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06년  노벨상을 탄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라진 자와 존재하는 자는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가까스로 마주 보고 있지만

"자작나무 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고

"겨울해가 드는 창가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있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이런 순간이 건절한 기도가 된다고 한 작가는

그녀가 쓰고 싶은 것이 '흰'책이었으며

이 책의 시작은 작가의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의 기억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작가는 수많은 흰 것들에 대해

짧은 생각과 메모를 적듯 

시적인 문장으로

담담히 써 내려간 책이다.

 

일일이 다 서술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독후감을 쓴다는 게 어쩌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

작게 나뉜 65개의 모든 글들이

주옥같이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라

책을 소장하며 

가끔 꺼내어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끝으로 한강작가의

'흰'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더 적으며

이 글을 끝내려 한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은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2024년 11월 3일 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