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에게 묻다
-프시케-
껑충하니
키 큰 청년 하나
내 머리 위에 서있다.
삶에 부대낀
푸석한 눈으로
초점 잃은 응시를
마다하지 않고 내 질문을 듣는다..
"네가 본 것들은 어떤 것들이니?"
그렇게 자세히 쳐다본 적 없는
가로등을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란 긴 목 내밀고
키 작은 나를 말똥 하니
내려다보며 이야기한다..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은 갖가지의
인생의 굴곡들을
내 희미한 빛 속에
숨겨두기도 한단다"
겨울이면
아침 산책길이
새벽어둠이 막 가시기 전
아직도 새벽이슬
뿌옇게 내리는
가로등의 얼굴은
마치.. 방금 분을 바른
수줍은 새색시같이 부끄럽다며
너스레를 떠는 가로등에게 다시 묻는다....
"어때.?
사람들의 고민들을
그렇게 높게 서서도 들을 수 있는 거니?"
자박자박
걷던 걸음 위로
깜박.. 가로등 불이 꺼지는걸
여러 번 아침 길에 만난 적이 있다..
제 몫의 시간을 채운 후..
시간이 되면.. 가로등도
잠자리에 들 시간인가 보다..
밤새 보초를 서며
밤이슬로
함빡 젖었어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막 잠드려는
가로등에게 뜬금없이 또 묻는다..
"잠을 자고 나면
또 다른 어둠을 비추는 그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들이 지겹지 않니?
어쩌면..
밤을 걸어보거나
새벽을 걸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늘 불 꺼진
잠에 빠진 가로등밖에
본일이 없어서...
가로등이 왜 거기 있는지 조차
모를 때도 있으리라..
" 밤과.. 어둠.. 새벽을 비추는 일은
오직 내가 해야 할 사명이거든".
새벽 어스름에...
비라도 내릴 땐..
더더욱.. 가로등의 맵시는
뽐을 내고 있다
조용히 내리비추는 불빛과
이미 땅에 떨어진
빗물에 비친..
노란 출렁임은
솜사탕처럼
부픈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고 있다..
내가 또 물었다..
" 너는 나같이 이렇게 움직이며
춤추고 싶지 않니?"
가로등 밑의
우산과
장화와
빗물은 왠지
오랜 친구처럼 잘 어울린다..
"내가 서있음으로
비출수 있는 공간이 더 넓기만 바랄 뿐..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걸"
철벅 철벅
첨벙거리며
물 튕기며 장화 신은
내 장난스러운 물장난에도
가로등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며
온통 내 우산 위에도
눈동자 속에도..
노란 웃음을 뿌려 놓는다...
또 내가 물었다..
"사람들은 네가 주는 그 노란 웃음의
포근한 아늑함을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을까?"
소복소복
눈 내리는 날
가로등의 불빛은
하얀 눈 위를
뾰족 뾰족 수놓으며
한껏 부푼
황금 불꽃을 만든다..
"모르지..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냥 어떤 날이고.. 어두움이 내리면
내빛이 안전을 위한
내 임무만 하면 되니까"
오랜만에
같이 산책 나온
딸아이의 깔깔거림에도
그저 헤벌쭉하게
명랑한 빛의 얼굴로
모녀의 그림자놀이에
기꺼이 끼어들기도 한다
아주 느리고 부드러운
실크 같은 은근한 눈길로
부럽게 흘기는 것을 본 내가
또 묻는다..
"우리 외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을 때
너는 무섭지 않니.. 혼자 서있는데..".
날 밝은 아침 길에 늘어선
날씬한 가로등들은..
누구 하나 아는척하며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그대로 그렇게
큰 키 자랑하며
오며 가며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에도
몸 웅크리지 않고
기역자로 잘도 버티고 서있다..
" 내 주위엔.. 머리 위로.. 하늘이 있고
가끔 키 큰 나무는
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새들도 종종 찾아가
말벗을 하고.. 바람은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부드러운 충고를 해주고 가지..
어떤 땐 달도 별도
나와 같이 어둠을 같이 빛내기도 하지..
이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할 수 있잖아..
가끔 지친 눈으로 올려다봐주는
친근한 얼굴들도 있는걸.."
아침 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공기에도
아침햇살 떠오르는.
일출에도..
쨍쨍이
빵긋 웃는 낮에도
뉘엿 뉘엇
노을 머금은
저녁 하늘 우울한 날에도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는
그 성실함으로
기다란
외로움 안고
멀찍이 떨어진
다른 가로등에게
마실도 못 가는
고독한 가로등에게..
이 말은 하고 싶었다..
"네가 그곳에 늘 있어줘서 고마워.."
오늘 아침..
카메라를 들이대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 보라고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하며.. 속삭였지만...
다른 포즈는 지을 줄도 모르는
영락없는 몸치인..
길쭉길쭉
키다리
우리 동네 가로등은
내게 웃으며 이야기해 주었다..
"아무런 표현 없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
가지고 있는 사물들..
같이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히렴....
있는 자체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친구가 되고..
사랑으로 같이 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깨달아야 해.
하나님이 주신 공통적인 이 세상에 끼쳐야 할
한 가지의 임무를 주었기에..
그것을 실천하라는 거야..
그게 바로 용서라는 날개를 가진
사랑이라는 천사거든...
내가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
내 사랑의 표현이듯..
어두운 곳곳을 찾아
따뜻한 빛으로
세상에 비추어봐.
용서의 날개를 가진 사랑이라는
천사의 이름으로.."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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