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을 읽어주며
시 읽어주는 엄마
- 프시케-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을 위해
계획 아닌 계획을 두서없이 세우다 보니
오늘은 간단하고
쉬운 일부터 하기로 했다
건희는 따사로운 봄볕을 만끽하며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바다에 갈때나 낚시를 갈 때 깔려고
가져가는 돗자리를 현관 앞에 깔고
두툼한 블랑켓을 바닥에 깐 다음
커다란 쿠션들을 내오고
다올 이를 위해
커다란 강아지 Stuffed 인형까지 동원해
선탠 자리를 마련했다
시간이 정오를 지난 터라
뒤뜰에서 하려고 했지만
현관 앞 햇볕이 더 따사로워
그곳으로 정했다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파란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건희와 나는 단번에 합의를 보았다
우선 딸기와 바나나를 갈아 만든
스무디를 만들어 한잔씩 들고
건희와 나는 아늑하게 마련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선탠 겸 독서를 하는 건희의 발가락을 쳐다보며
다올이 도 덩달아 어리둥절
두리번거리며 자기 자리를 잡는다.
마침 생각난
김용택 시인의 시를
마치 건희가 내게 보낸 편지처럼
건희에게 읽어주기로 했다
김용택 시인은
외국에서 유학하는 딸의 편지를 받고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쓰셨다고 한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땐
정말 딸이 쓴 편지 그 자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시인의 딸이라 그런지
편지도 참 시적으로 썼구나 하면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딸 건희를 보면서
나도 이런 시 같은 편지를
건희에게 혹은 영준이에게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를 쓰고 읽고 들을 줄 알지만
아마도 이렇게 시적으로 편지를 쓰거나
엽서를 써서
내게 보내줄 날은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보다 더 한국어를 잘했을 때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쓸려고 마음먹는다면
영어로도 쓸 수 있겠지만
그 운치가 영어 하고는 좀 다를 듯싶기도 하다
영준이라면
아마도 시적인
편지를 내게 썼을 수도 있겠다 싶은 건
어렸을 적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느 대학에서 방학 캠프로
글쓰기를 배울 때 지은 3편의 시가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인이 된 영준이의 마음에
그때의 시심이 아직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이긴 하지만
가끔 글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글귀를
몇 번 보내곤 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읽고 필사할 땐 몰랐는데
막상 건희에게 읽어주는데
눈물이 난다
감정이입이 된 듯..
마치 건희나.. 영준이가
내게 보낸 편지를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던 듯싶다
시에
화자는 피츠버그를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많은
뉴욕의 텅 빈 타임스퀘어 거리와
이 시에서 나오는
내장에서 석유냄새가 나는 도시가
스치면서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은 도시
주옥같은 시인의 시어들을 느끼며
뉴욕을 비롯한 전 세계의 COVID-19 상황이
속히 진정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딸과의 선탠, 그리고 시와 함께한
이 시간이
오랜 세월이 흘러
수많은 추억의 책 속
한 갈피에 아름답게 적혀있기를 바라며
어느 날
이처럼 정겨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니 언젠가 나도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따사로운 봄볕 속의
선탠, 그리고 시와 함께한
딸과 다올이 와한 소중한 시간을
적어본다
내일은 훈련 중인 영준이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김 용택-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들은 멀리 있고
햇살과 바람과 하얀 낮달이 네 마음속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한그루의 나무가 세상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야 하는지..
비명의 출구를 알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안심 속에 갇힌
지루한 서정 같지만
몸부림의 속도는 바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다.
사람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
아빠, 세상의 모든 말들이
실은 하나로 집결되는 눈부신
그 행진에 참가할 날이 내게도 올까.
뿌리가 캄캄한 땅속을 헤집고 뻗어가듯이
달이 행로를 찾아 언 강물을 지나가듯이
비상은 새들의 것,
정돈은 나무가 한다. 혼란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반성 직전의 시인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의 머릿속은 평생 복잡할 거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면
아빠의 눈빛은 집중적이래.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 권의 책이야.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높은 첨탑이 있는 송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와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한 시간들이
잎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시간,
오빠가 걸어 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피츠버그에서는 버스가 나무의 물관 속을 지나다니는 물같이 느려
피츠버그에 며칠 머문 시간들이
또,
그래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 장을 넘기면
한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외면과 포기보다 불안과 긴장이 좋아,
선택이 싫어,
아빠, 나는 고민할 거야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는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살 거야,
난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시계 초침처럼 떨리는 외로움을 난 보았어,
멀고 먼 하늘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거든
비행기 트랩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 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아빠는 시골에서 도시로 오시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갑자기 땅을 밀어내고
자기 자리를 차지해가는 그런 긴장과 이완,
그리고 그 크기는 나의 생각이야,
밤 냄새가 무서워
마루를 통통 구르며 뛰어가
아빠 이불속에
시린 발을 밀어 넣으면
아빠는 깜짝 놀랐지.
오빠는 오른쪽,
나는 아빠의 왼쪽에 나란히 엎드려
아빠 책을 보았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2020년 3월 2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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